2015년 10월 1일 목요일

불의한 세상에서 목회자가 보여주어야 할 모습이란

일단 동영상 하나를 보고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출처: http://m.blog.naver.com/tituslee2/220394971542>

대학생을 26년 동안 지도해 오셨다는 이승제목사님의 고언은 청년들에게 성경적인 가르침뿐만 아니라, 그 성경적인 가르침을 일상의 영역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신앙적인 지원을 목회자가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는 살아남기, 둘째는 문제의 본질과 원인 파악하기, 셋째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실력을 키우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청년대학생들에게만 적용되는 원칙은 아닐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목회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세속화된 교회가 넘쳐나는 곳에서 부교역자로 살아가는 일은 생각만큼 녹록한 일은 아닙니다. 그나마 좀 나은 교회를 찾을 수는 있겠지만 교회다운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99%의 부교역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승제 목사님의 진단대로 둘 중의 하나가 되는 듯 합니다. 그들 중 하나로 변질되든지, 아니면 기성교회에서 뛰쳐나가는 것이지요. 그러니 다음세대를 이어갈 부교역자들에게도 청년들에게와 똑같은 조언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선 살아남고, 그 속에서 교회의 세속화의 근본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실력 즉, 깊은 영성을 쌓아야 하겠습니다. 

제 경험으로 볼 때, 성도들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런 목회자를 찾고 또한 바라고 있습니다. 비록 그 교회 담임목사가 독재와 전횡을 일삼는 세속적인 목사라 할지라도 성도들은 부교역자들이 담임목사에 대해 불만과 비판의 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 목회자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동안 이것이 성도들이 신앙의 야성을 잃고 체제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라며 부교역자도 반드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 생각은 부교역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불의와 부패가 넘치는 곳에서 신앙인의 반응은 어떠해야 하는지 목회자, 특히 부교역자를 통해서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불의와 부패를 경험하지만 그로 인해 변질되지 않고, 불의한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목회자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회자가 되었을 때에야 성도들에게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불의를 경험하고 있는 이 시기는 제가 목회자의 덕목을 기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일종의 도제교육을 받는 시기라고 말할 수도 있지요. 
(도제교육에 관한 글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내가 만약 이 도제교육을 하고 있는 장인이라고 한다면 어떤 도제를 높이 평가하게 될까요? 첫째는 일단 살아남고,  둘째는 배울 것과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하고자 애쓰면서 스스로 발전해 나가며, 셋째는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고칠 수 있는 실력을 길러서 그것을 고쳐내는 사람이 아닐까요? 아마도 바로 그 때가 도제에서 장인으로 태어나는 시기이겠지요.

물론 이런 체제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적극적으로 체제 밖으로 자신을 헌신하시는 분들의 뜻과 열정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만한 판단과 각오가 있을 때까지는 어쨌든 불의한 상황에서 변질되지 않고 버텨내면서 체제의 민낯을 확인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며, 개인적인 차원에서 뱉어내는 불평과 비판이 아니라 좀 더 커다란 관점에서의 근본적인 인식을 갖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의 지난 날을 돌아보았습니다.
불의한 상황 속에서 타인을 비난하고 정죄하며, 상대적으로 나는 올바르고 개혁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나의 언행은 거칠었고, 때로 심하게 공격적이었습니다. 나 스스로에게는 백번천번 옳은 일입니다만, 과연 그것이 목회자의 모습이었을까 생각하면 심히 부끄럽습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나라도, 고통받는 이웃도 아닌,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015년 9월 2일 수요일

인간관계에서 일방적인 도움이란 없다!! - 영화 "마테호른"

아래 글은 영화 마테호른에 대해 상당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에 대해 미리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이 글을 보지 않기를 권합니다.



영화 "마테호른"을 보았습니다.

주인공 프레드는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고 아들과도 불화하여 아주 고독하게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중년 남성입니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주일에 늘 예배에 참석하며, 설교도 듣고 찬송도 부르건만 교회도 믿음도 그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좋은 옷을 입고 모두들 아무 문제 없는 듯 나와서 고상하게 예배를 드리고는, 그 어떤 사귐과 나눔이 없이 다시 자기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 프레드가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게 해주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인물은 의외로 모자란 듯한 중년남성 테오입니다.

어느 날, 프레드는 테오에게 돈 얼마를 도와주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차에 기름이 다 떨어졌다고 도움을 요청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 편 이웃집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돈을 구걸하고 있는 테오를 보고는 프레드는 달려나갑니다.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알고 보니 테오는 누군가를 제대로 속일 줄도 모르는 정신지체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었던 프레드는 그를 자신의 집으로 들여서 그에게 식사과 숙소를 제공합니다. 기본적인 생활도 가르치지요. 그런데 그 테오를 보살피면서 그는 덮고 있었던 그의 삶의 문제를 직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테오와 함께 자신의 삶을 문제를 결국 극복해 냅니다.

죽은 아내와의 관계도, 자신이 직접 쫓아내었던 아들과의 관계도 그는 용기 있게 풀어냅니다. 마테호른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프로포즈한 곳이기도 하며, 또한 그의 인생의 가장 커다란 문제가 풀리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은 혹시 프레드의 그것과 닮지는 않았는가 하구요.
주일마다 말끔히 차려입고 교회를 가서 예배도 드리지만, 거기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한 가지.
진정한 만남이 어떻게 우리에게 치유를 가져다 주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누군가를 도와야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주로 일방적으로 베푸는 자선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세의 문제점은 나는 너보다 더 낫다는 일종의 우월의식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9장 1~3절에서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장애인들도 다 하나님의 목적으로 위하여 태어난, 소중한 존재임을 제자들에게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을 보면,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자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도,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만난다면 우리는 서로를 돕는 사람이 됩니다.

영화 마테호른에서도 그같은 진실을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프레드가 테오를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테오가 프레드를 돕습니다. 오히려 테오가 프레드에게 훨씬 더 큰 도움을 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만나기만 한다면, 우리는 늘 서로를 돕는 사람이 됩니다. 그곳이 바로 천국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 정반대로 사는 세상, 나와 다르다고, 나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소외시키며 사는 세상이야말로 지옥입니다. 왕따를 양산해내면서 나는 왕따가 아니라고 말하는 우리네 아이들의 학교는 그런 의미에서 지옥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학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그대로 비춰내는 거울입니다.

부끄럽지만, 교회도 아직 장애인이나 새터민이나 이주노동자 혹은 결혼이주여성들이나 독거노인이나 성소수자를 만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에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희망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데에 있습니다.

프레드와 테오가 함께 처음 예배를 드릴 때, 목사님이 예배당에서 선포하고 있던 말씀이 바로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였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말입니다.

프레드는 얼떨결에 그 말씀을 실천한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 신비로운 섭리로 테오를 통해 용서하지 못했고 용서받지 못하며 살고 있던 불쌍한 인생, 프레드를 고쳐주신 것이 아닐까요?



2015년 6월 22일 월요일

영성일기로서의 라이프로그

라이프로그 lifelog 라는 말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기록한다는 의미입니다.다시 말해,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순간들, 영수증이나 영화표 같은 것들을 사진으로 찍거나 글로 그 때의 느낌이나 생각들을 간단하게 남기는 것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들이 오히려 소중한 법입니다. 우리는 너무 바빠서 앞으로 닥쳐올 일에 대해서는 골몰하지만, 우리가 지나온 하루에 대해서는 오히려 무관심할 때가 많습니다. 이 라이프로그를 활용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겐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간단한 영성일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저도 얼마전부터 라이프로그를 시작하였습니다. 

라이프로그를 기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에버노트를 이용하는 방법에 관한 글은 여기를 클릭하세요. 


저는 구글플러스의 콜렉션 기능을 이용합니다. 
라이프로그 라는 비공개 콜렉션을 만들어서 구글포토에 업로드 되어 있는 그날의 사진들을 모아서 글과 함께 라이프로그 콜렉션으로 포스팅을 하면 됩니다. 일상에서 모바일로 찍은 사진들이 모두 구글포토로 업로드되기 때문에 나중에 구글포토에 업로드된 사진들은 하루를 반추하기에 도움을 줍니다. 
또한 비공개콜렉션으로 모이기 때문에 한번에 살펴보기도 좋고, 무엇보다 에버노트와는 달리 용량제한이 없이 무료로 계속해서 업로드 할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구글서비스를 주로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에 기록하시든 영성일기로서의 라이프로그를 시작하시기를 여러분께 강력히 추천드립니다.

2015년 3월 16일 월요일

설교(들음)의 한계

이제는 까마득히 옛날이 되어버린 저의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수업시간 때 선생님의 설명을 들을 때는 다 알 것 같던 것이 막상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나 혼자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면 까마득히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 때가 있었습니다. 들어서 이해했다고 해서 완전한 앎에 이르렀다고 자신할 수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그토록 복습을 강조했던 것이겠지요. 

                                                                         <출처: 구글>

같은 현상이 설교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어도 그 때뿐인 것은 그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천은 복습과 같습니다. 실천이 있을 때 그 말씀은 온전히 내 속에 새겨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휘발되어 사라지고 맙니다. 여기에 설교의 한계가 있습니다. 설교가 아무리 은혜로워도, 실천 없이 은혜받았다는 감정의 고양만으로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는 못합니다. 

직접 실천으로 복습해야 합니다. 
신앙을 교리나 신학 같은 이론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신앙은 오히려 우리가 익혀야 하는 영적 걸음마와 같습니다. '일어나 걸으라! 내가 새 힘을 주리라'는 결론의 설교를 백 편을 들었다고 해도 , 당장 집에 돌아가 홀로 일어서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면 그의 신앙은 오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 실제로 내 두 다리로 일어서는 느낌과 기쁨을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일어설 때엔 넘어짐이 있겠지만 그 넘어짐을 통해 잡아주심도 경험할 것입니다. 잡아주심을 경험해야 설교를 통해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선순환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소그룹모임은 실천공동체여야 합니다.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다시 짚고, 실천할 때 예상되는 상황의 어려움이나 적용의 애매함이 있을 때 묻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어보면서 적절한 조언이나 인사이트, 격려 등을 얻을 수 있고, 그 실천으로 인해 다시금 더 깊은 말씀의 묵상으로 이어집니다. 



<출처: 구글>

마지막으로 실천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설교의 메시지가 아무리 도전이 되어도 "지금 당장" 그런 삶을 살아낼 수는 없습니다. 옛말에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 하였고, 또 '시작이 반'이라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큰 목표를 세우면 좌절만 경험할 뿐입니다. 지금의 영적 근력으로도 부담 없이 실천할 수 있는, 작은 목표를 잡으십시오. 

설교를 들음에 만족하지 말고, 믿음의 차원을 삶으로까지 확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