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8일 토요일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 - 가부장주의에서 한국교회를 해방시키기.

<아래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유교적 가부장주의의 특징은 성리학에 기반한 가문 중심의 사고다. 가문은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고, 가장을 중심으로 효와 예를 강조하는, 철저한 수직구조로 되어 있다.가문의 명예를 대표하며 동시에 가문의 차세대 주자인 가장과 맏아들에게 전체 가문의 대의가 집중되고,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오로지 이들을 위한 주변인으로 살면서 그들을 위한 희생을 강요당한다. 맏아들의 성공은 곧 가문 자체의 상승으로 여겨졌고, 이런 집단의 대의를 위해 소는 얼마든지 희생해야 마땅했다. 그런 점에서 유교 특히 성리학에 기반한 가족은 공동체라기보다는 일종의 집단주의에 가깝다.

우리나라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동기가 무엇인가? 여러 분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런 유교적인 가부장주의가 있었기 때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군부독재 정권은 몇몇 친정부기업 중 일부를 맏아들로 삼아 이들을 집중 육성하기로 한다. 이들의 성공이 곧 대한민국의 성공이며 대한민국의 국력과 국격을 높이는 길이라고 모든 국민들은 믿었고, 이들의 성장을 위해 착취를 감내하면서 그들을 위해 노동하고 그들의 제품을 구매해주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그렇게 애지중지 길렀던 맏아들이 가족들의 희생을 도외시한채 가족을 나몰라라 하는 어느 드라마의 아야기처럼 이 대기업들이 중소기업들과 국민들을 더욱 착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가부장주의는 우리 교회 안에도 유전자처럼 보이지 않게, 그러나 강력한 힘으로 존재한다. 흡사 교회는 하나의 거대한 가문이다. 교회를 대표하는 가장인 담임목사와 가문의 원로와 같은 장로님들로 이루어진 당회가 모든 결정을 한다. 가문에 해당하는 교회의 지위는 출석숫자와 담임목사의 명성, 그리고 교회건물 등으로 평가된다. 이를 위해서 주변인들은 특히 여전도회원들은 교회를 위하는 것이, 담임목사님을 잘 모시는 것이 곧 하나님을 위한 길이라 믿으며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였다. 

가부장주의의 특징은 대의(집단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목표)와 소의(구성원 각자가 가진 목표)가 갈등을 일으킬 때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조정되지 않고 무조건 소의를 희생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모더니즘이 부재한 나라다.모더니즘 사회애서는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이 이성에 근거하는 한 얼마든지 소의가 대의를 변경시킬 수 있다. 즉 대의를 중심으로 한 수직구조에 대항하는 힘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성리학적 유교구조에서는 대항하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를 위해서 소가 언제든지 희생할 수 있는 구조, 이 구조가 지금의 우리나라를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조가 교회가 공동체가 되는 데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다운 공동체, 예수님께서 꿈꾸셨던 교회 공동체를 이뤄갈 수 있을까? 이런 면에서 서양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회 공동체에 대한 담론, 곧 교회론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 옷일수 있다. 교회론이 론에서 교회로 육화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 맞는 새로운 적용이 필요하다. 과연 우리 교회를 유교에서 해방시켜 교회되게끔 해 줄 방법이란 무엇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2013년 5월 14일 화요일

목사의 가장 큰 덕목 - 패러다임 시프트

오늘날 목사로 살아가면서 혹은 신학교를 다니며 교육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 언젠가 내 마음 속에 늘 한 가지 질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목사는 뭐하는 사람인가?"였다.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벌이고 있는 작금의 행태는 망나니 같은 한둘의 돌출행동이 아니고, 목사라는 직함을 가진 자들이 너도 나도 벌이고 있는 추태의 정점이라는 점에서 빙산의 일각이다.물론, 이 상황의 책임을 모두 목사 개인에게만 떠넘길 수만은 없다. 사실 이런 상황은 한국 기독교회와 교인 모두의 책임이다. 그들을 정죄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그와 같은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내가 던진 질문이 바로 "목사는 뭐하는 사람인가?"였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어법에 불과했지만, 세월이 갈수록 그 질문은 문장 그대로 의문문으로 변했갔다. 

내가 보아 온 목회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교회에서 왕이었다. 그런데 견제가 없는 왕이다. 내가 속해 있는 예수교장로회 사람이라면 '장로'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다. 물론이다. 그러나 이 견제수단이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하면서 무력홰지기 시작했다. 교회가 부흥하면 해당 교회의 목사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목사로 성도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교회 부흥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역사의 가시적이고 확실한 표증이며, 목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종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가 대형화되면 장로의 숫자도 늘어난다. 담임목사는 1인이요, 장로는 다수가 된다. 다수는 뜻을 모으기가 힘들다. 더구나 그는 하나님의 인정받는 종이 아닌가. 이제 장로 중 1인은 담임목사의 뜻과 다르다 하더라도 섣불리 의견을 내놓을 수가 없어지게 된다. 또한 전통적인 유교 사회에서는 윗사람에게 반대하는 것보다 그것을 참고 인내하고 때로 복종하는 것,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집단우선주의가 미덕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장로들은 견제의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부흥한 교회의 담임목사는 이제 신성군주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타락으로 이어진다. 
교회가 크거나 작거나 부흥했거나 아니했거나 상관없다. 한국교회의 모든 교회와 목사들은 이 대형교회를 모델로 삼아 지금까지 달려왔다. 목사도 성도도 그런 목사를 동경했다. 말하자면 모두가 타락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목사는 왕이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그러니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온다. "목사는 뭐하는 사람인가?" 혹은 "목사다운 목사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목회자의 모습은 무엇인가?"

기능과 역할로 목사를 말할 수 없고, 인격이나 학벌로도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이 때론 필요하고 때로 좋은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목회자의 핵심은 아니었다. 목사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한다고 목사가 아니고, 좋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목사다운 목사라고는 말할 수 없다. 헉벌이나 지식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그렇다면 답은 무엇인가? 글쎄다. 누가 그것을 정의할 수 있겠는가만은 오늘 나는 나만의 답을 찾았다. 

그것은 바로 "현실의 제약이 있으나 그것을 이겨내고 현실의 제약을 넘어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사람"이다. 성경에 쓰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먼저 살아내고 구체적인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성경에 쓰인 이야기가 한낱 이야기가 아니며 하나님의 나라가 한낱 죽어서나 가는 천국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것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패러다임 시프트라고 말할 수 있다. 현실이라는 체제는 항상 사고의 틀을 한정짓는다. 현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규정지어준다. 이 현실의 힘은 태어나 살아가면서 체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미 우리의 마음 속에서 틀이 결정되는 것이다. 마치 코끼리 사슬 증후군처럼 말이다. 



더군다나 현실이라는 체제는 실제로 강력하다. 결코 코끼리 사슬처럼 그저 심리적인 장벽에만 머무는 기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이 현실 앞에서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인다. 현실을 도피하거나 현실에 순응하거나. 그도 저도 아니라면,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 극단적인 결말을 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그와는 다른 길을 택한다. 그에 관한 이야기가 빌레몬서에 아주 집약적으로 나와 있다. 빌레몬서는 단 한 장으로 이루어진 아주 짧은 장이지만, 현실이라는 체제를 어떻게 초월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도 바울과 노예 오네시모,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오네시모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이 등장인물이다. 그들에게 현실은 노예제도이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뜻에 따라 오네시모를 노예가 아니라 형제로 대하라고 강권한다. 현실의 패러다임을 뛰어넘은 사례다. 물론 현실적인 노예제도 철폐는 약 1800년이 지난 근대에 들어와서야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그 때 그런 사회를 이루었다. 

예수님도 정치세력인 로마와 종교세력인 대제사장,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사셨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고, 친히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그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목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런 모본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목사에게도 역시 현실이 존재한다. 교회 안에서는 교회 바깥에서는 보기 힘든 교회만의 현실이 있다. 그 현실 속에서 목사도 분투하지만, 대부분이 현실에 순응하면서 목사답지 않은 목사로 전락한다. 그런데 어떻게 성도들에게 힘있게 구별되어 살아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설사 말한들 그게 과연 얼마나 복음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목사는 현실 속에서 생겨난 패러다임과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그 패러다임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하는 치열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여줄 때에야만이 바로 그 목사는 목사다운 목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감동받는 것은 목사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목사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유한성과 한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려고 하는 그 진정성, 그 믿음, 그 확신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한다. 

2013년 5월 10일 금요일

목사가 되었다. 그래서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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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래서 목사가 되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목사가 직업이 되어서 그저 나에게 주어진 일, 곧 설교와 교구관리와 성경공부와 거룩하고 경건한 말투를 사용하는 것, 속마음을 감추고 그저 사람 좋은 미소만 짓는 것만 하고 있다면 도대체 목사가 된 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유혹과 한계들 앞에서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도대체 목사가 된 것이 뭐가 그리 축하할 일이겠느냐? 

목사가 되어 새벽기도와 성경공부가 의무가 되고 밥벌이가 된다면, 차라리 평신도로 살면서 주님을 사모함으로 드리는 단 한 번의 새벽기도와 단 한 번 말씀묵상이 오히려 더 하나님 앞에 기쁨이 아니겠느냐. 

성도들이 이미 하고 있고, 나도 예전에 했었던 그것.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것을 목사가 되어서는 왜 못하겠느냐. 

그래서 이제 나는 설교하러가 아니라 주님을 만나러 새벽기도에 간다. 아니, 가야겠다. 

2013년 5월 9일 목요일

부족한 리더십 아래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부족한 리더십이란 말은 리더에게 요구되는 핵심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리더를 일컫는 말이다. 
부족한 리더십의 유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능한 리더십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리더십이다.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악하긴 하지만 공적인 성격을 많이 띄는 자리일수록 또한 그 영향력이 큰 자리일수록 무능 그 자체도 불의에 속한다. 따라서 부족한 리더십은 불의한 리더십이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조직에서 우리는 이러한 부족한 리더십을 만난다. 그 이유는 리더 그 자신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리더에게 너무 많은 역할이 맡겨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리더를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권한과 책임이 집중되는 체제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체제를 바꾸는 일은 단시간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체제 자체를 변화시키는 일과 더불어 지금 현 체제에서 어떻게 최대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성경에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요셉이 그러하고 모든 선지자와 예언자가 그러하며 에스라 느헤미야 다니엘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이 그러한 분이시다. 

불의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유념하여 성경을 읽어야 할 때다. 

2013년 5월 1일 수요일

[뿌리 깊은 나무] 현 종교지도자들과 정기준의 공통점



요새 많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지나간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애청하고 있다. 재미도 있지만 지금 나의 상황에 중요한 통찰들을 많이 던져주는 좋은 드라마이다. 또한 세상이 좋아져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든 짬짬이 볼 수 있어서 TV시청을 위해 따로 시간을 뺄 수 없는 나에게 너무 좋다.

오늘 출근하면서 본 "뿌나"의 한 장면에서, 밀본 본원 '정기준'은 한글반포를 반대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모르겠는가? 글자와 권력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야.
중화에 속해 있는 나라의 지배층은 모두 그렇게 형성된 것이고.
현데... 글자가 반포된다면 그 뿌리가 흔들리는 것이다.
주상은 그것을 흔들려고 한단 말이다.
주상이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집현전을 없애면서 아무 것도 요구 안할 것 같은가?
글자를 빠른 속도로 유포시킬 각종 관청은 물론이요, 과거시험에조차도 그 글자를 쓰게 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는 관료체제 자체를 흔드는 일이야.
모르겠느냐? 글자란 권력이 모두에게 나눠지고 질서는 무너지고 나라는 혼돈 속으로 들어가는 게야!"

왜 정기준은 권력이 모두에게 나누어지면 질서가 무너지고 나라가 혼돈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가 생각하는 백성은 그런 존재였기 때문이다. 백성은 무지하고 이기적인 존재이며, 오직 사대부만이 이 조선을 제대로 통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똑같은 상황이 종교개혁 때 있었다.
개신교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주장한 신학적 근거는 "만인제사장설"이다. 하나님과 인간을 매개하는 '사제'는 필요하지 않다.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고 모든 인간은 그 예수님의 보혈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모두 제사장이다. 이것이 바로 만인제사장설의 요체이다.

그러나 지금의 개신교 종교지도자들은.. 간단히 말해 목사들은 자신들을 '사제'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그리고 정기준과 똑같은 우려를 하고 있다. 목사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만인제사장을 실현하면 교회는 질서가 무너지고 혼돈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평신도를 평가절하하고 있다. 목사들의 눈에 그들은 너무 믿음이 약하고 성경에 대한 지식도 얄팍하며 세상의 유혹에도 흔들리기 쉬운 존재다. 그들에게 교회를 맡기면 교회는 당장  세상의 악에 물들어 버릴 것이며, 이단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다.

예수님과 세종대왕은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웃기지 말라고 해"

나는 거기에 "좋아요"를 살포시 누른다.